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시어도어 루스벨트 (문단 편집) ==== 친일의 이면 ====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친일 성향은 이론의 여지가 없으나, 사실 이는 문화적 부분에서 기인한 것이 컸기에, 그 역시 정치적인 부분에서는 일제를 도우면서도 때론 경계하기도 했다.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일제에 대해 많이 알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일제를 경계하는 방법도 알게 된 것이다. 때문에 정작 일본에서는 시어도어 루스벨트를 무조건 친일이라고 평가하진 않는데, 앨프리드 머핸에게 보낸 1897년 서한에서도 일본의 위협을 거론하며 하와이의 병합을 서둘러야 한다고 촉구한 적도 있었다. 또 [[러일전쟁]]에서 일본에 우호적이었으나 동시에 필리핀을 향한 일본의 세력확대를 경계하여 [[포츠머스 조약]]에서 러시아에도 지나친 손해가 가지 않게 노력하였다.[* 사실 이는 러일전쟁이 끝난 이유가 '일본의 압승' 이 아닌 피의 일요일 사건이라는 러시아 내부의 문제였기 때문이다. 일본은 당시 러일전쟁에만 7년치 재정을 투입하고 있었으며, 이것도 모자라서 영국과 미국에게 채권을 판매하여 간신히 전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반면 러시아는 발트함대가 쓰시마 해전에서 일본에게 박살이 나는 등 열강으로써의 체면을 구기기는 했으나, 전쟁을 수행하는 데 있어서 재정적인 문제는 일본에 비해서 훨씬 여유로웠다. 그러다가 러시아에서는 피의 일요일 사건을 진압해야 하고, 일본에서는 재정문제로 인해 전쟁 수행능력이 한계에 도달했다는 이해관계가 일치하면서 포츠머스 조약을 체결하게 된 것이다. 그러다보니 협상 분위기도 러시아가 '이럴 거면 그냥 전쟁 계속 하자' 는 식으로 강짜를 놓는 경우도 있었고, 일본 역시 미국의 중재가 있었다고는 하나 시모노세키 조약 체결 당시와는 달리 이것저것 마음껏 뜯어내지도 못했으며, 이는 일본 내부에서 [[히비야 방화 사건|반미 감정 폭발]]의 원인이 되었다.] 이로써 러시아와 일본이 서로 견제하길 바랐고 러일전쟁 이후 일본이 강성해지는 조짐이 보이자 일본에 대한 냉담한 태도를 보였다. 루스벨트는 하와이 일본인의 본토 이주를 엄금하고 일본 해군의 태평양 상륙을 우려하여 미국 해군의 증강을 촉구했다. 유진 헤일 상원 의원에게 보내는 1906년 10월 27일자 서신에서는 태평양의 반일 캠페인을 우려하며 일본과의 전쟁이 있을 시 미래가 염려된다고 우려하였다. 1907년에는 일본과의 신사협정을 맺어 비숙련 노동자의 이민을 금지하기로 합의하였다. 법무장관 녹스에게 보낸 1909년 2월 8일자 편지에서 그는 이민 문제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일본인 노동자는 배제되어야 하는데, 전쟁의 위험을 피하는 똑똑한 방법으로 해야 한다고 했다. 이 같은 루스벨트의 이민 제한 정책은 후에 1924년 이민법에서 일본계를 포함한 아시아계의 전면 이민을 금지하는 정책으로 확대됐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미국의 사학자 앨프리드 휘트니 그리즈월드의 미극동정책사 131페이지 참고.] 한편으로는 언론인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가 반일 캠페인을 전개해 일본인에 대한 여론이 악화되자, [[샌프란시스코]] 시 당국이 일본인 학생들을 [[중국인]]들이 다니는 아시아인 학교로 전학시키려 했는데, 이를 일본인을 중국인과 동급으로 취급하겠다는(?) 의미로 받아들여 직접 개입해 무산시킨 사례도 있었다. 이 개입은 본인의 일본 애호 성향이 원인이었지만 이 사건을 계기로 루스벨트는 일본과의 외교에서 상당한 이득을 얻어내기도 했다. 그는 친일 성향이 있었고 일본 문화에 호감을 가졌지만 기본적으론 정치인이었기 때문에, 오늘날의 [[와패니즈]]들 마냥 일본에 맹목적으로 우호적인 태도를 갖진 않은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